사라진 산업, 고래고기 한 점에 담긴 장생포의 애도와 향수

울산 장생포는 과거 고래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그 영광이 빛바랜 채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과거 포경업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번성했으나,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1986년 이후 고래잡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 인해 장생포의 산업과 생업, 그리고 포경선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과거의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장생포의 고래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과거 포경 산업의 상징이었던 고래고기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며,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장생포 앞바다는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모여들던 깊은 바다였으며, 넓은 만과 조수간만의 차가 적은 지리적 이점 덕분에 고래들의 이상적인 서식지였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며 태화강, 삼호강, 회야강 등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부유물은 새우를 비롯한 작은 물고기들을 불러들였고, 이는 고래들에게 귀한 먹이가 되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장생포를 ‘귀신고래’의 단골 방문지로 만들었으며,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기에도 용이한 항만 조건을 갖추게 했다. 6~7층 규모의 냉동 창고가 즐비했을 정도로 어업이 번성했던 장생포는 울산 공업 발달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1973년 남양냉동을 시작으로 세창냉동과 같은 냉동 창고들이 들어섰으나, 경영 악화로 문을 닫으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폐허가 된 냉동 창고는 이제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2016년 울산 남구청이 건물과 토지를 매입한 후,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총 6층 규모의 이 공간은 지역 문화 예술인들의 거점이 되는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험장과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특히, 2층 체험관의 ‘에어장생’ 항공 체험은 아이들과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며, 종이 고래 접기, 바다 만들기 등 다채로운 놀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는 기회를 제공한다. 수십 년 된 냉동 창고 문을 그대로 살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과거의 공간을 새로운 가치를 지닌 공공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업사이클링의 좋은 예다.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2층에 상설 전시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이곳은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며, 한강의 기적을 이끈 중화학 공업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매캐한 연기로 인해 발생했던 ‘온산병’과 같은 중금속 중독 질환의 아픔 또한 기억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교훈을 전달한다.

장생포의 고래고기는 단순히 음식을 넘어 과거를 애도하고 향수를 느끼게 하는 매개체다. 사라진 산업, 사라진 생업, 사라진 포경선의 흔적을 고기 한 점에 담아 음미하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닌, 과거를 되돌아보는 의례와도 같다. ‘고래고기는 장생포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말처럼, 여전히 이곳에서는 밍크고래 등 혼획된 고래를 합법적으로 유통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2만 원에 달하는 ‘모둠수육’은 삶은 수육과 생회가 어우러져 다채로운 맛을 선사하며, 특히 ‘우네’나 ‘오배기’와 같은 고급 부위는 고래 특유의 맛과 식감을 극대화한다. 신선한 살코기는 소고기 못지않은 맛을 자랑하며, 부위마다, 조리법마다 다른 소스를 곁들여 다채로운 풍미를 즐길 수 있다.

장생포의 고래요릿집은 과거 고래 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과 6.25 피란민,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 역군들을 기리는 문화적 지층을 품고 있다. 장생포의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고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우리는 고래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한다.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