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문화/생활

  • K-콘텐츠 애니메이션 ‘케데헌’, ‘한류’를 넘어 ‘글로벌 문화 전유’의 새 지평 열다

    최근 전 세계 언론의 문화비평란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흥행은 단순히 기록적인 성공을 넘어, 기존의 한류 현상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고 있다. ‘케데헌’은 자체적인 서사적 가능성과 더불어, 한국인 디아스포라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신선한 서사 자원의 존재를 각인시키며 글로벌 문화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한류는 한국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현상과 그 파생 효과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케데헌’ 역시 한국의 대중문화인 케이팝을 중심으로 제작되었기에 한류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케데헌’은 한국에서 직접 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마치 <뮬란>이나 <쿵푸팬더>가 글로벌 문화가 로컬 문화를 전용한 사례로 평가받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케데헌’은 글로벌 문화가 한국의 로컬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해낸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케데헌’은 북미 지역의 한인 2세 정체성을 가진 원작자 및 제작자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점에서 애플 TV의 2022년작 <파친코>와 유사한 지점을 가진다. <파친코>가 3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다룬 실사 시리즈로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배경으로 한국 배우들을 대거 기용했던 것과 달리, ‘케데헌’은 한국 문화의 오랜 무당 서사와 케이팝이라는 현대적 대중문화를 결합하여 서울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차별점을 가진다. 실제로 <파친코>의 세트가 한국 여행객을 직접적으로 유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케데헌’이 그려내는 서울의 모습은 향수와 호기심을 자극하며 전 세계 시청자들의 한국 방문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케데헌’의 등장은 디즈니의 가족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비교되며 삽입곡 시장에서도 새로운 대안의 출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효과적인 활용이 크게 작용했다. 소니는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구현했으며, 제작진은 시청자들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텍스트 전략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케이팝이 가진 고유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합했다.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양식은 탈식민적 세계화의 걸림돌로 작용해왔던 비서구인의 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었다. 기존의 케이팝은 아이돌의 ‘아시아성’이라는 장벽 때문에 팬덤의 영역에 머무는 경향이 있었으나,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장벽을 허물거나 대폭 낮추었다. ‘케데헌’의 캐릭터들은 인종적 복잡성 없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쉬우며 코스프레 또한 용이하다. 이미 국내에서는 플레이브나 이세계 아이돌과 같은 가상 아이돌 그룹이 해외 투어를 진행할 정도로 케이팝 문화 속 캐릭터 문화가 발전했기에, ‘케데헌’의 캐릭터들은 세계관을 구축한 채 세계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고 볼 수 있다.

    케이팝 문화에서 세계관, 즉 그룹의 서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유사한 음악적 색깔을 가진 그룹들 사이에서 차별화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팬들이 깊이 몰입하고 해독해야 할 텍스트를 두껍게 만들어 팬 활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현 시대 글로벌 문화 환경에서 가치 지향성이 중요해짐에 따라, ‘케데헌’의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세계관 속 걸그룹과 보이그룹 캐릭터들은 자아 발견 이야기를 반복하는 디즈니, 개인 성장형 모험 스토리를 제공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그리고 세계를 구하는 우주 대전쟁을 펼치는 DC 및 마블 유니버스와 비교했을 때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선택지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케데헌’의 서사는 수많은 프리퀄과 시퀄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대적인 이야기 속에서 헌터스들의 세계 투어와 로컬 캐릭터들과의 대결을 통해 다양한 로컬 버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창출해낼 수 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 서사적 가능성과 더불어, ‘케데헌’은 한국인 디아스포라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귀중한 서사 자원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특히 북미 한인 2세 제작자들이 가진 독특한 한국 문화 경험과 애정은 ‘케데헌’이 글로벌 시장과 이토록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중재(mediation)’를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만들어낸 굴곡진 역사는 한국인의 경험을 통해 세계사를 포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형성해왔다. 이는 단순히 한류 현상을 넘어, 한국의 미래가 한인 디아스포라와 어떻게 연결될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케데헌’은 이처럼 한류가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은 한류 연구자로서 다양한 연구 방법을 적용해왔으며, 스스로를 세상 속 의미 생산을 탐구하는 기호학자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등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 문화 산업, 한류 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다년간 국제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활발히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지역 공연예술 생태계 자생력 강화, ‘공연예술 지역유통 지원사업’ 대폭 개편

    기초 공연예술 분야의 지역 내 유통 및 활성화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무용, 뮤지컬, 연극, 음악, 전통 등 다양한 장르의 우수한 공연 작품들이 서울 외 지역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렵고, 지역 공연단체와 공연장은 자체적인 자생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공연예술 생태계 전반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2026년 공연예술 지역유통 지원사업’의 공모 방식을 대폭 개편하고 나섰다.

    새롭게 개편된 사업은 공연단체와 공연시설이 균형 있게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과거와 달리 공연단체와 공연시설의 수요를 동시에 반영하는 절차를 신청 과정에 도입하여, 양측이 지원 한도와 예산 범위 안에서 서로를 선택할 경우 사업비를 최종 지원하게 된다. 이는 참여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절차를 간소화함으로써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다. 신청 요건을 충족하는 공연단체와 공연시설은 별도의 심의 과정 없이 단체, 작품, 시설별 기준에 따라 총예산 범위 내에서 상호 선택한 공연을 지원받게 된다. 문체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단체·작품·시설의 자격 요건을 검토하고 예산을 지원하며, 실제 사업 운영은 공연시설과 공연단체가 공연계약을 체결하여 협의·운영하는 방식을 따른다.

    특히 이번 공모에서는 기존 ‘이(e)나라도움’ 시스템 대신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새롭게 개발한 공연예술 전용 기업 간 플랫폼인 ‘공연예술유통 파트너(P:art:ner)’를 활용한다. 이 플랫폼은 공연단체와 공연장이 정보를 공유하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소규모 공연장이나 인지도가 부족한 신생 예술단체도 자신들의 정보를 올려 교섭 기회를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를 통해 사업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더욱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올해는 구분해서 공모했던 ‘유형1 사전매칭’과 ‘유형2 사후매칭’을 내년에는 통합 공모하여 절차를 간소화하고, 예산이 남을 경우 추가 공모를 진행할 예정이다.

    문체부는 이러한 사업 개편을 통해 우수한 기초예술 작품이 지역에서 더욱 활발하게 공연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공연단체의 자생력을 높이고, 지역 주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은향 문체부 예술정책관은 “사업 공모 구조를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개편하여 더욱 많은 예술인과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본 사업은 무용, 뮤지컬, 연극, 음악, 전통 등 기초 공연예술 5개 분야를 지원하며, 서울 외 지역의 공연단체와 공연장을 대상으로 한다. 내달 25일까지 예술경영지원센터 누리집(www.gokams.or.kr)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 사라진 산업의 애도, 장생포 고래문화의 재해석

    울산 장생포의 고래 관련 문화는 단순히 과거 포경 산업의 흔적을 넘어, 시대의 변화와 함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때 울산 지역 경제를 지탱했던 고래 산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금, 장생포는 옛 영화를 추억하고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의 산업적 영광이 현재의 문화적 공간으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함의가 담겨 있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해 본다.

    장생포는 예로부터 풍부한 고래 자원으로 인해 번성했던 지역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서식하기 좋은 깊은 수심과 풍부한 먹이를 갖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장생포 앞바다는 고래들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1946년 최초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된 이후 근대 포경 산업의 중심지로 장생포를 발돋움하게 했다. 고래 기름과 단백질은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고, 장생포는 ‘개가 만 원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라는 말이 나올 만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수출입 선박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6~7층 규모의 냉동 창고가 즐비했던 당시의 모습은 장생포의 과거 위상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결정으로 장생포의 고래 산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때 도시의 부흥을 이끌었던 산업의 몰락은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고, 당시의 냉동 창고들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며 폐허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과거의 아픔과 변화는 현재 장생포의 문화 콘텐츠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시간이 흘러 2016년, 울산 남구청은 폐허가 된 냉동 창고를 매입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 2021년 ‘장생포문화창고’를 개관했다. 이곳은 단순한 박물관을 넘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점이자 시민 누구나 무료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복합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6층 건물에는 소극장, 녹음실, 연습실은 물론 특별 전시관, 갤러리, 미디어아트 전시관까지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체험 전시 ‘에어장생’ 프로그램과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미디어아트 전시이다. ‘에어장생’은 고래 캐릭터를 활용한 항공 체험으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조선의 결, 빛의 화폭에 담기다’ 전시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 조선 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현대적인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하여 시민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일깨우고 있다. 또한, 수십 년 된 냉동 창고의 문을 그대로 보존한 채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업사이클링의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장생포문화창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기념관’이다. 이곳은 울산의 근현대 산업 발전 과정을 보여주며, 특히 1980년대 온산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발생했던 ‘온산병’과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한 기록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과거 산업 발전의 이면에 존재했던 어려움과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상기시키며,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자세를 강조한다.

    한편, 장생포에서는 여전히 고래고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혼획된 밍크고래를 유통하며 ‘고래고기는 장생포에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의 고래 요리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과거 산업에 대한 애도와 향수를 담는 의례적 의미를 지닌다. 12만 원짜리 ‘모둠수육’은 살코기, 껍질, 혀, 염통 등 다양한 부위를 맛볼 수 있으며, ‘일두백미’라 불리는 소와 같이 고래 한 마리에서도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네’나 ‘오배기’와 같은 고급 부위는 고래 특유의 풍미와 식감을 극대화하여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장생포의 고래 관련 문화는 사라진 산업에 대한 애도와 향수, 과거의 어려움으로부터 배운 교훈,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결과물이다. 장생포의 고래는 더 이상 바다에서 볼 수 없지만, 고래고기와 고래 관련 문화 콘텐츠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씹고 도시의 기억을 삼키며 공동체의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영광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을 넘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지역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100만 년 제주 땅의 속살, 용머리해안과 고사리해장국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다

    제주 관광 산업의 침체 우려 속에서, 100만 년의 역사를 간직한 용머리해안은 여전히 제주의 숨겨진 보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많은 제주 도민조차 그 가치를 온전히 알지 못하거나 방문 기회를 놓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제주의 독특한 지질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잠재적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용머리해안은 제주를 대표하는 로컬100 유산으로서 그 이름값을 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물때와 날씨에 따라 출입이 제한되는 등 방문의 제약이 따른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운영되는 관광안내소에 입장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미끄러운 지형으로 인해 편안한 신발 착용이 권장된다. 용머리해안은 제주 본토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 약 100만 년 전 얕은 바다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생성된 화산체다. 단일 분화가 아닌 간헐적인 분출로 인해 세 방향으로 쌓인 화산재 지층은 이 지역이 제주의 가장 오래된 땅임을 증명한다. 파도와 바람에 깎여나가고 다시 쌓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이곳은, 사진이나 영상만으로는 그 웅장함을 담아내기 어렵다. 직접 마주했을 때 비로소 용암과 바다, 그리고 100만 년의 시간이 빚어낸 풍경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검은 현무암과 옥색 바다가 어우러진 장관, 움푹 들어간 굴방과 넓은 침식 지대, 그리고 사암층과 해안 절벽은 제주의 태초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용머리해안을 둘러싼 지형은 진시황이 용의 기운을 끊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는 신화로도 유명하다.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의 기이한 지형은 이러한 신비로운 전설과 더불어 제주 최초의 땅으로서의 역사적, 지질학적 가치를 더한다. 거북손과 다양한 어패류가 붙어 있는 바닷가와 지역 할머니들이 좌판을 펴고 판매하는 해산물들은 제주의 삶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보여준다. 이처럼 웅장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용머리해안 방문과 함께 제주의 독특한 식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다. 척박한 화산 땅에서 물과 곡식이 부족했던 과거, 제주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온 두 가지 주요 작물은 고사리와 메밀이었다. 다년생 양치식물인 고사리는 척박한 화산암에서도 튼튼한 뿌리를 내려 빗물을 저장하며 생존했고, 다양한 종류의 고사리가 제주의 생태계와 식재료의 시작을 이루었다. 독성이 있지만 삶아서 말려 독성과 쓴맛을 제거한 고사리는 제주 사람들의 귀한 식재료이자, 제사나 명절 음식에도 빠지지 않는 중요한 식재료였다.

    이러한 제주만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음식이 바로 ‘고사리해장국’이다. 논농사가 어려운 제주에서 돼지는 가장 친근한 가축이었으며, 돼지를 잡은 후 남은 뼈로 끓인 육수는 다양한 국의 기본이 되었다. 모자반을 넣으면 ‘몸국’, 뼈를 넣으면 ‘접작뼈국’, 그리고 고사리를 넣으면 ‘고사리해장국’이 완성된다. 육개장의 고사리가 소고기를 대신하듯, 제주 고사리해장국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가루와 함께 걸쭉하면서도 은은한 감칠맛을 선사한다. 메밀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구수한 맛이 일품이며, 제주 사람들은 이러한 맛을 ‘베지근하다’고 표현한다. ‘베지근하다’는 고기 등을 푹 끓인 국물이 구미를 당길 정도로 맛있고 기름지면서도 담백해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으면 죽처럼 되직해지는 고사리해장국은 입에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제주의 거친 삶 속에서도 이토록 담백하고 유순한 맛을 만들어낸 제주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유채꽃이 만발한 산방산 아래, 용머리해안이 그려지는 풍경 속에서 고사리해장국 한 그릇은 100만 년의 제주 땅을 관통하는 시간 여행을 선사한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사히 여기는 마음이 ‘폭싹 속았수다(수고하셨습니다)’라는 제주 방언처럼 따뜻하게 와 닿는 경험이다.

  • 유네스코 등재, ‘반구천 암각화’의 6000년 서사를 현재로 불러온 진짜 과제

    반세기 전, 1970년 12월 24일과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전후로 국내에 두 개의 중대한 선사 시대 유적이 연이어 발견됐다. 울산 언양의 절벽에서 발견된 최초의 암각화, 그리고 인근 대곡리에서 발견된 고래, 사슴, 호랑이 등 다양한 동물과 사냥 장면을 담은 또 다른 암각화다. 당시 ‘절벽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는 말에 이끌려 이곳을 찾았던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 발견은 우리나라 선사 역사 연구에 있어 ‘획을 긋는 전환점’이었다. 초기에는 ‘천전리 암각화’와 ‘대곡리 암각화’로 불렸으나, 현재는 ‘반구천 암각화’로 통칭되며 이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식 명칭 역시 ‘반구천 암각화’다. 이 암각화는 선사 시대부터 무려 6000년에 걸쳐 이어져 온 인간의 상상력과 예술성,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바위 위에 새긴 ‘역사의 벽화’로 평가받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통해 “선사 시대부터 6000여 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임을 강조하며,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인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키워드는 ‘사실성’, ‘예술성’, ‘창의성’으로, 이는 2010년 잠정목록에 오른 지 15년 만에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결정적인 요소다. 천전리 유적에는 약 2.7m 높이, 10m 너비의 바위 면에 높이 620여 점의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청동기 시대에 추정되는 추상적 문양과 신라 시대에 새겨진 명문으로 구성된다. 한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새끼 고래를 이끄는 무리, 작살에 맞아 배로 끌려가는 고래의 모습, 그리고 호랑이와 사슴 등 육지동물과 풍요를 기원했던 제의 흔적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놀라운 유적들은 고미술학계에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불리기도 한다. 1987년 MBC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 현장을 찾았던 필자는 해 질 녘 햇살에 비친 50여 마리의 고래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는 단순한 동물의 묘사를 넘어 집단 의례의 도상이자 인류 예술의 기원, 나아가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보드와 같은 역할을 했다. 6000여 년 전 동해 연안 거주민이 집단으로 고래를 사냥하고 뭍으로 올라 반석 같은 바위에 이를 새긴 것은 하늘로 띄운 기도이자 공동체의 삶을 기록한 생활 연대기였던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비견될 만한 인류 선사 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찬란한 유산은 지난 반세기 동안 수몰 위협과 싸워왔다. 댐 건설로 인해 고래 유영이 기록된 바위가 수위에 잠겨 박락이 떨어져 나가고, 어설픈 탁본으로 원본이 상실되는 일도 있었다. 최근 잦은 가뭄으로 암각화가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점증하는 기후변화와 댐 운영의 변수는 ‘반구천’을 언제든 ‘반수천’으로 만들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다. 물속에 잠긴 유산은 세계유산으로서의 지위를 잃을 수 있으며, 등재 이후의 보호·관리 계획이 부실할 경우 유네스코는 등재를 철회할 수도 있다. ‘기적의 현장’을 ‘수몰의 현장’으로 되돌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제 진정한 과제는 등재 이후부터 시작된다. 울산시는 ‘고래의 도시’를 표방하며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암각화를 단순 보존을 넘어 체험형 테마공원, 탐방로, 교육 프로그램, 워케이션 공간까지 아우르는 생동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있다. 이번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AI 기반의 스마트 유산관리 시스템, 암각화 세계센터 건립 등 미래형 전략도 추진된다. 그러나 관광 인프라라는 명분 아래 생태 환경이 훼손되거나 과잉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유산의 본질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프랑스 라스코와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사례에서 보듯, 보존과 공개 사이의 긴장 관계는 피할 수 없다. 두 유적 모두 관람객 증가로 인한 훼손 발생 후 복제품을 통한 ‘간접 관람’ 방식으로 전환했다. 원본이 주는 ‘아우라’는 최상이지만, 후대에 이 소중한 유산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현대 기술인 3D 스캔, 디지털 프린트, AI 제어 등을 활용하여 원본의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반구천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의 꿈은 유네스코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이제 이 거대한 바위의 장엄한 서사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로 승화되어야 할 때다.

  • 이름 불리고, 고통 넘어, 마음 두드리며… 끝나지 않은 한류의 여정

    전 세계를 휩쓰는 한류 현상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그 배경에는 ‘이름 붙여짐’의 역사와 ‘고통과 기다림’의 시간이 녹아들어 있었다. 문화 콘텐츠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과정은 ‘진정성’과 ‘공감’을 기반으로 하며, 이러한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류는 처음부터 명확한 실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존재했으나 이름 불리지 않았을 때는 그저 ‘몸짓’에 불과했다. 한국 드라마가 해외로 수출되고 K팝이 전 세계 팬들의 환호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중화권 매체에서 ‘한류(Hallyu)’라는 이름이 붙여지면서, 이 현상은 비로소 하나의 ‘실체’이자 ‘문화적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세계가 이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한류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닌,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부여받은 문화적 현상이 된 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소비물이 아닌,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수용’의 결과물임을 시사한다.

    오늘날 세계를 감동시키는 한류는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에 비유되듯, 그 시작은 한국 현대사가 겪어온 굴곡진 시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 분단과 전쟁의 상흔,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의 수많은 울음과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류가 피어날 수 있었다. 마치 봄부터 울어온 소쩍새와 먹구름 속 천둥이 응축된 에너지가 되어 한 송이 국화를 피워내듯, 한국 사회가 겪었던 모든 시련과 회복의 역사가 문화적 승화인 한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콘텐츠 상품을 넘어, 한국 사회의 존재와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이처럼 고통과 기다림 끝에 피어난 한류의 진정한 힘은 ‘공감’과 ‘진정성’에서 비롯된다. 김용락 시인이 ‘BTS에게’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K-콘텐츠는 언어를 넘어 마음을 두드리는 힘을 지닌다. BTS가 “LOVE MYSELF, LOVE YOURSELF!”라는 메시지를 통해 전 세계인과 공감대를 형성하듯, K-콘텐츠는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마음속을 두드리는’ 능력을 발휘한다. 팬덤은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문화의 공동 창작자이자 공감의 공동체로서 이러한 힘을 더욱 확장시킨다. 완성도 높은 스타일뿐만 아니라,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자기 고백이 세계의 감수성과 접속하는 지점이 바로 한류의 핵심 비결이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은 한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여정’임을 강조한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말처럼, 한류 또한 절정에 이르지 않았으며 더 많은 서사와 깊은 공감, 다양한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제 한류는 지금까지의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가치와 다문화적 포용, 인간성 회복을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한국 사회 안의 진실을 잊지 않는 ‘진정한 여행’을 통해, 한류는 창·제작자에게 영감과 상상을, 플랫폼과 유통 현장에는 전략과 방법론을, 연구자에게는 전망과 통찰을, 정책 담당자에게는 기획과 비전을, 그리고 수용자에게는 향수와 감동을 주는 의미 있는 문화 현상으로 지속될 것이다.

  •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 단순 업무를 넘어선 가치와 자부심의 원천을 묻다

    최근 군 부대를 중심으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는 많은 군인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혼란과 불안을 방증한다. 나라를 지킨다는 본연의 임무에 헌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여론이나 대중의 목소리에 상처받고 좌절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선 군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잃어버린 자부심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힐링 강좌에 대한 간절한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같았으면 강연료나 시간, 비용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 판단하여 대부분 거절했을 요청이었지만, 올해는 그들의 메일에 담긴 진정성과 간절함 때문에 여러 차례 군 부대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강연의 시작은 언제나 동일한 질문으로 채워진다. “군인은 무엇을 먹고 사나요?” 혹은 “군인은 왜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드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생계나 의무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군인이라는 직업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들이 헌신하는 이유에 대한 깊은 탐색을 요구한다.

    이 질문은 소방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소방관은 왜 죽을 각오를 하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가? 돈을 많이 주기 때문인가? 보상이 많아서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군인과 소방관이 수행하는 임무의 위험성과 중요성에 비해 보상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과거 NASA의 한 청소부가 했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96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아폴로 11호 프로젝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NASA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대통령이 한 청소부에게 “이번 프로젝트에서 어떤 일을 담당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저는 사람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짧은 대화는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업무를 단순한 노동이 아닌, 더 큰 목표와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을 때 발휘되는 엄청난 힘을 보여준다.

    또 다른 맥락에서, 군인들이 왜 헌신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최고급 쇠고기의 맛에 대한 이야기로도 연결될 수 있다. 한우와 미국산 최고급 등급 쇠고기 중 어떤 것이 더 맛있느냐는 질문에, 모두 최고급 쇠고기는 어떤 원산지든 맛있다고 답한다. 이는 과거 미군 부대에 최고급 등급의 쇠고기가 우선적으로 보급된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시절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보급 정책은 단순히 식사의 질을 높이는 것을 넘어, 군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가치 인정’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직업 중 하나인 소방관에게 국민들이 존경을 표하는 이유와 군인들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같다. 세상과 국가, 그리고 국민들이 그들의 숭고한 가치와 헌신을 인정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표하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직업의 명칭을 묻는 것을 넘어, 그 일에 부여하는 의미와 자신만의 멋진 스토리를 만들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명확하고 자랑스러운 답변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일에서 진정한 만족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동아시아 음악극의 현주소를 묻다: 국립극장의 야심찬 ‘세계 음악극 축제’

    전통과 현대의 음악극이 한자리에 모이는 뜨거운 축제가 국립극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난 9월 3일(수)부터 28일(일)까지 개최된 <창극 중심 세계 음악극 축제>(이하 ‘세계 음악극 축제’)는 우리나라 창극의 위상을 높이고 동시대 음악극의 흐름을 조망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축제의 개최 배경에는 한국 전통 음악극인 창극이 직면한 위기와 그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반으로 여러 배우가 배역을 나누어 연기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극으로, 1900년대 초 형성되어 현재까지 발전해 왔다. 판소리의 창(노래), 아니리(사설), 발림(몸짓) 등의 요소를 활용하지만, 1인 또는 2인극인 판소리와 달리 다인극 형식으로 공연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수시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국립극장의 <세계 음악극 축제>는 그 첫 회라는 점과 세계적인 축제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올해 첫 회를 맞이하는 축제의 주제는 ‘동아시아 포커싱(Focusing on the East)’으로, 우리나라 창극을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전통 음악 기반 음악극 총 9편을 23회에 걸쳐 선보인다. 이는 거의 한 달간 이어지는 풍성한 일정이다.

    축제의 개막작으로는 국립극장 제작 공연인 국립창극단의 신작 <심청>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효녀 심청의 고전적 서사를 따르면서도, 2017년 ‘올해의 연출가’로 선정된 요나 김이 극본과 연출을 맡아 파격적인 재해석을 시도했다. 기존의 자기희생적 효심에 초점을 맞춘 해석에서 벗어나, 심청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내며 오늘의 시선으로 전통을 재해석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직접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공연을 본 이들의 호평이 이어지며 <심청>은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해외 초청작 <죽림애전기>는 중국 광둥성을 기반으로 발전한 월극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가면을 쓴 배우들이 서사에 맞춰 노래, 춤, 연기에 무술까지 더한 역동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2023년 홍콩 아츠 페스티벌에서 제작되어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번 축제를 통해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위나라 말기에서 진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죽림칠현’ 후손들의 삶을 그려낸 <죽림애전기>는 한국의 창극처럼 중국의 전통극이 어떻게 현대적인 감각과 결합하여 재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공연장을 찾은 중국인 유학생 호곤 씨는 <죽림애전기>가 가정과 국가라는 두 측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문화적 원형과 현대 기술의 결합이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세계 음악극 축제>가 한국 문화정책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행사이며, 창극 중심의 주제 아래 다양한 국가의 음악극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문화 교류의 장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호곤 씨는 한국 문화 콘텐츠 제작자들이 세계화된 시각과 문화 수출 의식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장점을 흡수하여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점을 높이 샀다.

    또 다른 국내 초청작인 <정수정전>은 조선 말 작자 미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판소리와 민요를 통해 다채로운 캐릭터와 서사를 엮어낸 작품이다. 부모를 여읜 정수정이 유교 사상이 팽배한 조선 시대에 여성으로서 겪는 고충을 이겨내고 남장을 한 뒤 과거 시험을 보는 등,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강인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정수정의 모습은 당시 여성들의 애환을 대변하는 동시에, “모든 것의 중심에 너를 두거라”라는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특히 이 작품은 창작하는 민간단체가 국립극장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국립창극단과 민간 예술 단체 간의 교류 및 협업의 중요성을 시사했다.

    <세계 음악극 축제>는 ‘동아시아 포커싱’이라는 첫 번째 주제를 통해 동아시아 3개국의 전통 음악극의 과거, 현재, 미래를 탐구하는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이는 앞으로 어떤 주제로 축제가 이어질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또한, 국립극장 프로그램 외에도 광주아시아문화전당, 국립민속국악원 등 여러 기관에서 주관하는 한·중·일 공연이 연계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어 있어, 지역 간 문화 교류의 폭을 넓혔다. 앞으로 다양한 해외 작품 초청과 국공립 및 민간 작품의 협업을 통해 전 세계 다채로운 음악극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글로벌 축제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축제 기간 동안 관람객들을 위한 ‘부루마블’ 이벤트 등 다양한 즐길 거리도 마련되어, 축제의 흥미를 더했다. <세계 음악극 축제>는 단지 공연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동아시아 음악극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중요한 문화적 담론의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 한류의 지속가능한 미래, 내부 차별 해소가 관건

    최근 한류는 BTS, <오징어게임>, <기생충>을 넘어 더욱 광범위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케이팝 그룹 블랙핑크, 세븐틴, NCT는 BTS의 앨범 판매 기록을 경신했으며, 특히 스트레이 키즈는 를 포함한 7개 앨범이 연속으로 빌보드 Top 200에서 1위를 차지하는 전례 없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 그룹의 멤버 중 두 명이 호주 국적이라는 점은 영어 소통과 군 복무 등 잠재적 위험 요소를 극복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며, 이는 향후 케이팝 그룹들의 안정적인 성공을 위한 중요한 레시피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BTS의 복귀와 더불어 케이팝의 미래는 더욱 밝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류의 폭발적인 성장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 수를 2000만 명 이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한국 관광 산업에도 새로운 기록이 될 것이다. 비록 연간 3000만~4000만 명을 기록하는 일본, 중국이나 2024년에 1억 명을 돌파한 프랑스에 비해 아직 세계 최고의 관광대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류의 강세는 한국 관광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증가는 단순히 미디어를 통한 접촉을 넘어, 한국을 직접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한류 확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흐름 속에서도 한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내부적인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거리에서 한국을 생중계하는 관광 유튜버들의 카메라에는 아름다운 야경과 번화한 거리뿐만 아니라, 명동, 광화문 등 도심에서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과격한 구호의 혐중 시위도 담기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이면에 대한 놀라움과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또한, 글로벌 팬들은 한국 콘텐츠 내부에 나타나는 인종주의적 감수성이나 차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케이팝 팬덤 내부에서는 이미 새로운 남성성, 여성성과 같은 젠더 표현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한국 콘텐츠는 기존의 지배적인 남성성과는 다른 부드러운 남성성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아이돌 문화는 전 세계 청년들에게 보다 자유로운 젠더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케이뷰티의 미백 중심적인 측면은 인종과 피부색주의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기도 한다. 케이팝은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속에서 성 정체성과 피부색으로 표현되는 인종 문제가 교차하며 건강한 논쟁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한류 연구자들은 한류 소비자들이 콘텐츠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서 새로운 가치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한류 현상의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한다. 압축 성장을 거쳐 온 한국의 경쟁 사회와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상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한국의 픽션물들은 선진국 시청자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식민 경험, 전쟁, 분단 등 극한의 어려움을 겪고도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이룬 대한민국의 역사가 극복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류가 만들어내는 매력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신비로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과정은 항상 위태로움을 동반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우리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이다. <오징어 게임>의 외국인 캐릭터 묘사나 <청년경찰>의 연변 범죄자 집단 묘사는 외국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주며 국내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연결된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과도한 미적 기준이나 드라마에서의 여성, 성소수자 재현에 대한 팬들의 토론은 현실 속 미투 운동이나 퀴어퍼레이드 논란과 맞닿아 있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 명동에서 마주치는 과격한 혐중 시위는 미디어로 한류를 접한 팬들이 한국의 차별적인 현실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충격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

    한류는 ‘밑에서부터의 세계화’로, 힘없는 일반 수용자들이 만들어낸 버텀업 문화 현상이다. 따라서 선한 영향력, 배려, 연대, 돌봄, 겸손,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케이팝 그룹과 팬들의 관계, <케데헌>의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가치 역시 이러한 맥락과 일치한다. 한류는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비주류의 아름다움이며, 차별과 배제의 담론은 그 최대의 적이다.

    결론적으로, 한류의 미래 위기는 시장 축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차별이라는 적과의 싸움에서 패배할 때 찾아올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제자리걸음을 해 온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이며, 이는 곧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 조선왕릉, ‘보여주기식’ 정책 넘어 ‘체험형’ 문화 행사로 국민 참여 유도

    조선왕릉을 둘러싼 획일적인 관람 방식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방문객들은 단순 관람에 그쳐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문화재청은 국민들이 조선왕릉을 더욱 가깝고 풍요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선왕릉대탐미」라는 새로운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8개 왕릉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매달 다양한 프로그램과 체험 기회를 제공하여 방문객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조선왕릉대탐미」는 방문객들이 각자의 취향과 상황에 맞춰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핵심으로 내세운다. 특히, 개인 방문객을 위한 ‘태강릉-왕릉산책 프로그램’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참여 가능한 유연성을 자랑한다. 이 프로그램은 10월 25일에는 퀴즈를 풀며 왕릉을 탐방하는 특별 회차로 운영될 예정이다. 태릉과 강릉에서는 입장료가 개인 1,000원, 단체 800원이지만, 내국인 만 25세부터 65세까지는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노원구 주민에게는 50% 할인 혜택이 제공되며, 무료 관람 대상자는 별도 증빙이 필요하다. 태릉에서 발급받은 입장권으로 강릉까지 입장할 수 있으며, QR코드를 통한 입장 방식이 적용된다.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 해설사 없이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이다. 태릉·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에는 QR코드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스캔하면 음성 가이드가 재생되어 라디오를 듣듯이 왕릉 곳곳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오디오 가이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명확하게 구성되었다. 어로를 따라 걷거나 정자각 앞에서 제례 공간에 대한 설명을 듣는 등, 각 유적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함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이며, 강릉은 조선 13대 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능으로, 강릉은 쌍릉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더불어, 「조선왕릉대탐미」는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태릉과 강릉 모두 휠체어와 유모차 대여가 가능하며, 특히 유모차는 24개월 미만 영아까지 대여할 수 있어 어린 자녀가 있는 가족도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아이들이 야외에서 놀이하듯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가족과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조선왕릉대탐미」 행사 예약은 국가유산청 국능유적본부 누리집을 통해 통합 예약 시스템에서 진행된다. 9월에는 <음악과 함께하는 조선왕릉 이야기길(사릉)>이 모집 중이며, 음악회와 노리개 만들기 등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10월 11일에는 <음악과 함께하는 조선왕릉 이야기길(광릉)>이 열리며, 금방 댕기 만들기, 향첩 만들기 등의 체험이 제공된다. 청소년 자녀를 둔 가족에게는 10월 4일 <의릉 토크콘서트>와 10월 11일 헌인릉에서 열리는 창작뮤지컬 <드오:태종을 부르다>가 추천된다. 또한, 10월 25일에 예정된 <왕릉산책: 특별 회차>는 아직 모집 전이며, 추후 예약 시스템에 공지될 예정이다.

    이처럼 「조선왕릉대탐미」는 과거의 정적인 문화유산 관람 방식을 넘어, 국민들이 조선왕릉의 역사와 가치를 직접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참여형 문화 행사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10월 말까지 이어지는 이 행사는 자녀와 함께하는 특별한 체험 학습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